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즈하라 시게루 (문단 편집) == [[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|도에이 플라이어즈]] 감독 시절 == [[파일:external/www.jiji.com/photo05l.jpg]] 하지만 예전부터 명감독의 이미지가 강한 미즈하라인지라 감독으로 오라는 곳은 많았다. 수많은 구단들의 영입 의사가 있었지만, [[도에이 플라이어즈]]의 구단주인 [[오카와 히로시]]가 [[삼고초려]]에 버금가는 간곡한 추파를 보내면서 결국 1961년 도에이의 유니폼을 입었다. 이 때 오카와 구단주는 미즈하라 감독 취임식에서 '''"돈은 얼마든지 내겠지만 입은 내지 않겠다"'''[* 원문은 '''金は出すが, 口は出さない。'''팀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겠으나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오카와는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구단 수뇌부가 돈 들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. 같은 도쿄를 연고지로 하던 [[치바 롯데 마린즈|다이마이 오리온즈]]의 구단주 [[나가타 마사이치]]는 그래도 자기 팀 아낀다고 사재를 털어 홈구장인 [[도쿄 스타디움(야구장)|도쿄 스타디움]](위치선정 미스와 팀의 저조한 인기로 막대한 적자만 내고 결국 철거당했다)을 지을 정도였다.] 라는 일본 야구계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. 당시 도에이는 [[장훈(야구선수)|장훈]], 부스지마 쇼이치, 야마모토 하치로 등의 중심타선과 [[도바시 마사유키]]를 필두로 하는 마운드의 주축 인원이 대부분 20대 중초반의 젊은 팀이었지만,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분위기였다. 미즈하라는 특유의 근엄한 카리스마로 젊은 선수들을 잘 추슬러 선수들에게 이기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고, 취임 첫해인 1961년 [[난카이 호크스]]에게 아쉽게 [[퍼시픽리그]] 우승을 내주었지만[* 그리고 난카이는 그 해 [[일본시리즈]]에서 미즈하라가 물러난 뒤 감독을 맡은 1년차의 [[카와카미 테츠하루]]의 [[교진군]]에게 패퇴했다. 본의 아니게 제자가 스승님이 1959년에 당한 치욕을 갚아준 셈이었다.] 리그 2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다. 이듬해에는 고교 최고의 투수이던 [[오자키 유키오(야구)|오자키 유키오]][* [[장훈(야구선수)|장훈]]의 나니와 상고 후배이기도 하다.]를 중퇴시켜 영입하고, 투수 안도 모토히로, 내야수 이와시타 코이치[* [[빙그레 이글스]] 초대 타격코치를 역임했다.], 아오노 슈조 등을 팀에 끌어들여 중용하는 등 적절한 전력 보강과 미즈하라 야구에 확실히 녹아들어 한몸이 된 팀워크를 바탕으로 1962년 처음으로 [[퍼시픽리그]]를 제패하고 [[일본시리즈]]에 진출, 난적 [[한신 타이거즈]]를[* 한신 타이거스도 이 해 [[양대 리그]] 시행후 처음으로 [[센트럴리그]]를 우승하고 올라왔고, 미즈하라의 교진군 시절 스승인 [[후지모토 사다요시]]가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다.] 꺾고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 제일을 이룩하였다. 이후 도에이는 미즈하라가 재임하던 1967년 까지 줄곧 A클래스(시즌 3위 이상)를 유지했지만[* 미즈하라가 감독으로 재임한던 1961~1967년의 도에이 성적은 2-'''1'''-3-3-2-3-3등 이었다.] 더 이상의 투자와 전력보강을 원치 않는 구단의 태도에 실망한 미즈하라는 1967년을 끝으로 도에이 감독을 그만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